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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 진담에 취하다
우은환(TV끼고 사는 여자) | 승인 2017.02.07 16:10

TV가 ‘먹기’ 시작한 것은 꽤 되었다. 온갖 음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침샘을 자극했고, 먹성 좋은 출연진들은 꺼지지 않은 허기를 불러왔다. 예민한 기계들이 즐비한 스튜디오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피워 가마솥을 거는 것도 주저하지 않던 TV는 ‘먹방’이란 신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 ‘마시기’를 시작한다.

tvN, '인생술집' 포스터

마시는 척 하지 않고 진짜 술을 마시는 설정은 간간이 있었지만 대놓고 술을 마시는 프로그램은 처음이다. 이름하여 「인생 술집」(tvN). “노곤했던 하루 해가 지면 약속이나 한 듯 하나 둘 켜지는 네온사인들 속에 여기 연남동 골목의 작은 집에도 불이 켜집니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술집은 문을 연다. 형식상으로는 음주 토크쇼, 느낌상으로는 일본 드라마 「심야 식당」과 닮아 있다. ('심야식당'은 일본 TBS TV에서 2009년부터 방송된 드라마. 밤 12시가 되면 불이 켜지고 아침 7시면 문을 닫는 뒷골목 식당 ‘めしや(밥집)’, 이곳을 찾는 손님들과 주인장인 마스터의 이야기다. 현재 시즌4까지 제작, 방송되었다)

술 마시며 방송을 한다고 했지만 정말 그렇게 마실 줄은 몰랐다. 그저 한 두 잔 마시거나, 마시는 척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어떤 때는 맥주로, 어떤 때는 소주로, 어떤 때는 와인으로 초대 손님의 기호에 따라 주종은 달랐지만 술은 끊이지 않았다.

한 잔의 술은 처음 만난 사람들을 형과 아우로 부르게 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나이에 맞춰 순식간에 호칭이 정해졌다. 그리고 또 한 잔, 주머니 잔돈까지 탈탈 털어 술을 마셔야할 만큼 가진 것 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가끔은 눈가가 촉촉이 젖어오기도 했고, 괜한 헛기침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떨어질 듯 말 듯 눈가에 맺힌 남자의 눈물은 상당히 멋졌다.

「인생 술집」은 손님에 따라 분위기가 바뀐다. 남자 손님이 올 때는 ‘으쌰’ 하는 분위기로 시작해서 ‘의리’로 마무리 되지만 여자 손님이 올 때는 ‘꺄르륵’ 간지러운 웃음과 소소한 수다에 빠지다보면 어느새 집에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사람 따라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술은 언제나 술술 넘어갔다.

인생술집의 MC 셋(왼쪽부터 신동엽, 탁재훈, 김준현)

스튜디오가 아닌 경의선 숲길 옆 골목에 있는 「인생 술집」에 어떤 손님이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흥겨울 수 있는 것은 술집 주인인 진행자들의 몫이 크다. ‘방송계의 디오니소스’라 불리우는 신동엽은 신(神)답게 능수능란했다. 분위기를 쥐었다 폈다 하며 어색함이 자리잡을 틈을 주지 않았다. ‘악마의 입담’ 탁재훈은 당황스런 질문과 엉뚱한 답변으로 술과 수다 사이의 허를 찔렀다. ‘절대음감 예술인’이란 의외의 별칭으로 불리우는 김준현의 기타솜씨는 놀라웠다. 국수를 끊지 않고 후루룩 한 숨에 들이마실 때의 먹방 김준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익숙함과 의외성이란 면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인생술집'에 출연한 배우 조진웅

술은 노래를 불러왔다. 식탁을 두드리는 손장단에 맞춰 기타 반주가 시작되고 초대 손님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배우 조진웅의 “낭만에 대하여”는 열정적이었고, 야구 선수 김현수의 ”서른 즈음에“는 수줍었다. 한 때 래퍼로 음반을 내기도 했던 배우 장혁이 흥얼거리는 ”Creep"는 진한 삶의 고뇌가 배어있었다. 술 때문이었을까,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가슴 속 깊은 곳이 찌릿해졌다. 이 즈음에서 출연진들의 혀는 약간 구부러졌고, 눈 주위도 붉어졌다. 얼굴만으로는 쉽게 취기의 정도를 구분할 수 없었는데, 진짜 술을 마시고 있었구나 하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술은 소품이 아니라 진품이었다.

제작이 없는 날 찾아가 본 인생 술집은 해가 지길 기다리는 보통의 술집 같았다. 방송 일정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지 않았다면 이곳이 방송 세트인 지 알 수 없을 만큼 평범했다. 실내는 정갈했고, 다양한 종류의 술잔과 그릇들이 무심한 듯 선반에 올려져있었다. 가운데 놓인 테이블과 의자는 취중진담 무대답게 늦은 오후의 햇살 한 자락이 걸쳐있었다.

격식과 긴장을 벗어놓고 술보다 사람에게 취하게 한 대담한 시도는 적중했다. 거짓이 참인 양 둔갑하는 세상의 역겨움을 잠시 잊고 오늘 하루도 수고한 자기 자신에게 술 한 잔 권하고 싶은 밤, 나만의 인생 술집이 열린다.

 

우은환(TV끼고 사는 여자)  tigerheehe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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